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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이야기 / 피카소 큐비즘 마티스 인상주의

u-noh 2020. 8. 18.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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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충주의와 과잉 

 

 

 

   파리의 미술계는 중대한 동요를 겪었다.  

'해방된' 회화의 획일적 상황이 무너지기 이전인 1948년, '전통'을 향한 호소는

선택된 미술의 땅인 프랑스의 결정적인 역할을 부각 시켰다.

프랑스는 한 세기 동안 인상주의와 큐비즘이라는 중요한 두 운동을 태동시킨 곳이었다.

따라서 추상과 표현주의는 배격되었다. 파리파의 중심적 역할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이

'전통'에서 그것들은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양하고 전 세계에 걸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에르 프랑카 스텔의 말에 따르면

이 전통은 오직 "미래의 미술이 게르만주의의 병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피카소는 어떤 모델 이상의 존재였다.

그리고 마티스의 방대한 파피에 데쿠페들은,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로마 조각가들의 직접 깎기 방식"을

되살려냈다. 미국의 유명한 미술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에게 마티스는 프랑스 회화 미술의 연속성을 일관성 있게

완성해 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풍경과 내면적 광경으로 귀착되는 이러한 프랑스 미술의 진정한 '의식의 지도자'는

피에르 보나르와 자크 비용이었다. 

왜냐하면 드랭과 블라맹크, 반 두겐은 나치가 조직한 1941년의

선전 선동 독일 순회 여행에 참여함으로써 명예를 영원히 더럽혔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랑스의 '전통'은 1943년 프랑스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에

바젠과 에스테브, 푸주롱, 라피크, 마네시에, 에두아르 피뇽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종교 예술의 지지자들과 '총살당한 이들과 프랑스 국민의 당'에 봉사하는

무조건적인 정치적 참여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한 대립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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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냉전이 자리 잡자 분열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상황은 패배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모든 자리를 내주었다. 

1948년 푸주롱은 「총안(銃眼)에 있는 화가」를 출간하고 선언 「시장의 파리 여인들」을 내놓았다.

같은 시기에 장 뒤뷔페는 앙드레 브르통, 장 폴랑과 함께 아르 부뤼트사를 건립하고 모든 

미적인 순응주의를 거부하는 전복적인 미술을 설교하였다.

이때부터 장 뒤뷔페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 징조가 보일 때 재료와 우연, 몸짓, 충동, 인간의 삶에 대한 조상 전래의 자연스러운 태도에 대해

존경을 표하면서 창의력을 발휘하는 찬미"를 요구하는 작업이 되었다.

 

 같은 해 파리에서는 코펜하겐, 브뤼셀, 암스테르담에서 온 일군의 젊은 화가들이 코브라 그룹을 결성하였다.

시적이며 성상 파괴적인 회화의 동물인 코브라의 독(毒)은 창조되는 대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창조의 행위에 우선권을 부여했다. 코브라 그룹은 맹렬한 활동을 펼쳐 3년이라는 존속 기간 내내

많은 전시회와 간행물을 선보였다. 아스게르 요른, 카렐 아펠, 콩스탕, 도트르몽, 피에르 알레친스키는

분출하는 풍경을 그려냈다.

가공의 동물들이 존재하고 통속 미술과 오세아니아 미술로 가득 찬 그 풍경은

격렬한 단색들이 조명해 보이는 꾸밈없는 충돌을 관통했다.

그들은 무미건조하고 고상한 취향에 대항하여, "우리에게서 조금씩 섬유 재료의 즐거움을

박탈하는 플라스틱 재료가 일상생활 속으로 침입하고 있음"을 고발하였다. 그리고

1953년에 아스게르 요른과 도트르몽은 기 드보르와 함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시초를

마련했다. 또한 1948년에 보르뒤아스와 리오펠을 중심으로 한 캐나다의 오토마티스트들은

[총체적 거부]를 출판하였는데, 그 내용은 무의식에 의해 야기되는 철저한 추상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라루스 서양미술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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