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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13

서양미술사 중에서

미술의 영역을 사진술사에게 넘어간 그때 화가의 작업 대상이자 주제인 회화의 특수성을 우선시함으로써 단절은 이행된 것처럼 보였다. 완성되지 않은 것, 남겨진 것, 그려지지 않은 것은 정통적인 회화적 방식과 대등한 물질적 명백함의 상태를 보였다. 이대부터 유일한 승선자인 미술가는 사회에서 점점 더 소외되어가는 향해 속에 들어갔다. 회화의 단절된 연속성의 모습처럼, 미술사의 흐름 속에서 방향 이탈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한 세기 동안 많은 실험과 형식주의자들의 차가운 태도에 자주 위협받았던 아방가르드 유파들이 드디어 일어났으며, 미술가들은 종종 자신의 특권에 집착하는 미술계의 볼모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1962년 앤디 워홀의 과 더불어 그 방향 이탈이 끝나기 시작했다. 앤디 워홀의 작품 '마릴린'은 마릴린 ..

Art 2020.09.13

서양미술사 '팝'에 대하여

'팝'이라는 단어는 1956년 리처드 해밀턴의 작은 콜라주 작품에 처음 선을 보였다. 이 작품은 여러 영역을 망라하는 인디펜던트 그룹이 런던의 화이트 채플 아트 갤러리에서 개최한 전시회 포스터 초안이었다. 리처드 해밀턴은 그 자신이 광고 작업을 한 적이 있었으며, 현대 미술 인스티튜트에서 4년간 보석 세공술과 활판 인쇄술, 산업 디자인을 가르쳤다. 그리고 해밀턴과 여러 건축가 화가, 디자이너들은 놀라운 환경을 실현했다. 그들은 문화적 공간 속으로 일상을 옮겨와 그것의 전복을 제시했고, 열광적인 야외 축제의 형태를 띤 이 진정한 집단적 퍼포먼스는 매우 냉소적이면서 전조적인 성격을 표명했다. 라는 긴 제목을 가진 리처드 해밀턴의 콜라주는 가전제품과 같은 기계적 복제 도구들이 부각되어있는 기발한 재산 목록을 ..

Art 2020.09.10

서양미술사 1950년대 이야기 중에서

전후 세계 곳곳에서 재건과 소비의 시대를 맞아 광고의 놀라운 도약과 가정용 가전제품의 유례없는 발전으로 정돈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감수성의 물꼬가 시작되었다. 1957년 브뤼셀 만국 박람회에서 고도의 상징성을 띤 아토미움이 솟아올랐다. 이 건축물은 공간 속에 태평양의 원자에 대한 복수를 새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 엑소시즘에 생생한 형태를 부여한 사람은 춤추듯 움직이는 조각을 만들어낸 조각가 알렉산더 콜더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 미국인 거장은 철사로 만든 작은 서커스를 상연하여 몽파르나스의 친구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1930년대에 콜더는 공간 속의 놀라운 데생에 전념하였는데, 그 기법은 마치 안무와도 같았다. 1950년대가 되어 이러한 기법은 열망에 오던 거대한 규모를 띠게 되고 마르셀 뒤샹과 한스..

Art 2020.08.24

내적 제약의 요구에만 복종했던 현대미술...

실존적 경험으로서 세분되고 단편적이며 일시적인 성격을 띤 미술은 '내적 제약'의 요구에만 복종하였다. 창조적 행위는 위험한 안무의 덧없는 순간성과 바타이유가 라스코의 저 깊은 곳 속에 위치한 미술의 기원에서 길어 올린 태고의 확실성 사이에서 동요하였다. 이러한 창조 행위는 한계를 모르는 대담한 탐구가 형식상 발견하는 우연과 표현의 필요성을 결합시켰다. 1930년대의 추상은 철퇴를 맞게 되었다. 기하학적인 낙관론에 의거해 세워진 이 '죽음의 무대 장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았다. 샤를 에스티엔의 소책자 [추상 미술은 아카데미즘인가?]는 1950년 드반의 추상 미술 아틀리에 설립을 매우 환영하였다. 이러하여 다른 방식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재구성되었던 195년대의 미술계에서 50대의 한스 하르퉁은 ..

Art 2020.08.23

서양 미술사 현대미술 중 브람 반 벨데는...

브람 반 벨데는 사무엘 베케트 연극의 한 인물처럼 "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더 성공한다."라는 자코메티의 신조를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자신을 스스로 "완전히 파손되어 어쩔 줄 모르는 인간"으로 칭했던 그는 1940년에 베케트를 만났다. 그의 그림은 실패와 존재에 대한 무능력함의 회화로서 '끝없는 폭로이자 베일 뒤의 베일, 면 위의 면, 불완전한 투명성, 그리고 벗겨낼 수 없는 것, 무(無)를 향한 폭로'였다. 그것은 또한 시인 자크 퓌트망이 말하는 타협을 모르는 독창성의 '침묵'이기도 했다. 퓌트망은 "예술의 일상적인 수다 속에서,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며 그의 중요성을 나타내 주는 표시"라고 이야기하였다. 사실주의의 확실성 및 전쟁 이전의 기하학적 추상의 세계에서 멀..

Art 2020.08.22

서양미술사 중 유럽의 부활

프랑스의 미술 기관들은 아라공을 수장으로 하는 공산주의 지식인들이 폐허가 된 미술계 한복판에 내던진 폭탄과 싸우고 있었다. 프랑스식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1948년 가을 미술전을 여는 영광을 누렸으며, 앙드레 푸주롱과 더불어 행방기의 국가 미술상을 받는 기적을 달성했다. 같은 해, 프랑시스 그뤼베르가 사망했다. 프랑시스 그뤼베르는 예리한 풍경화와 아틀리에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실주의를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의 아틀리에에서 모델의 고독과 허약하고 벌거벗은 잔인한 진실은 거리를 두고 포착되었다. 이는 그가 공간에 천착하고 인물을 엄격하게 멀리하는 배경의 비참한 세부에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참상 묘사 주의의 새로운 신동이 나타난 것도 역시 이해였다. 베르나르 뷔페가 그린 뚜렷한 검은 윤곽의 최초의 굶주린..

Art 2020.08.21

서양 미술사 페르낭 레제 / 페르난드 레게르 회화 그림 작품

5년간의 미국 망명으로 활력을 되찾은 페르낭 레제는 1947년 의기양양하게 돌아왔다 1940년 10월에 그를 뉴욕으로 데려다주었던 배의 발치에서 물놀이를 하는 젊은 마르세유 부두 노동자들의 이미지 속에서 페르낭 레제는 회화의 정면성을 깨뜨릴 방식을 끌어냈다. 그때부터 그가 그려낸 형상들은 현재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획득한 자유를 담은 회화적 공간 속으로 던져졌다. 뉴욕의 밤에 매혹된 레제는 색을 데생에서 분리하고, '탄력적 표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표면 위에는 곡예사들과 자전거 타는 사람들, 그리고 음악가들이 자리 잡았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미술을 만들어내면서 커다란 주제들만을 다루는 데 동참했다. 그는 1924년 ..

Art 2020.08.17

앙리 마티스

앙리 마티스 역시 파리에서 멀어졌다. 그는 1938년 니스를 굽어보는 시미에의 그랑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전쟁의 위협적인 혼란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고 백지 위에 그려진 윤곽의 단순한 굴곡의 빛을 통해 예견된 어둠에 맞서기 위해, 그의 방을 곧장 여인들의 미소와 육체로 뒤덮었다. 이리하여 그의 은 라 투르의 불타는 빛의 미묘한 저항과 17세기 초의 빛에 대한 그의 끈질긴 관심에 합류했다. 피로하고 지친 데다 그의 손은 더 이상 붓을 잡기 힘들었지만, 그는 1947년에서 1948년까지 연작을 그렸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절지 구아슈화에 의존하였다. 1943년부터 방스에 머물러 있던 마티스는 앙리 드 몽테를랑의 의 비범한 삽화들과 롱사르와 샤를 도를레앙의 시의 삽화들을 그린 후 돌연 20점의 섬광 ..

Art 2020.08.16

거장들 / 피카소

거장들 독일 점령에서 해방이라는 사건은 '베이비 붐' 이 보장하는 새로운 시작의 전망과 더불어 모든 이에게 그러했듯 피카소에게도 행복한 한 시기를 열어주었다. 그는 도라 마알과 보냈던 고통스러운 시기를 접고, 젊고 아름다운 프랑수아 질로를 만났다. 그녀는 그에게 두 아이를 낳아주었고 행복으로 빛나는 그림들을 그릴 수 있는 영감을 주었다. 파리를 떠난 그는 1948년 발로리스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도예 작업을 하였다. 1946년 말부터 그려진 일련의 유화와 데생들은 자연 본래의 환경 속에서 제작되어 어떤 작품들보다도 지중해적인 성격을 띠었다. 의 분위기를 띠는 이 작품들은 현재 앙티브의 피카소 미술관 컬렉션을 이룬다. 피카소는 특유의 에너지를 통해 모든 표현 방식을 시도하였다. 그는 무를로의 공방에서 판화와..

Art 2020.08.15

공산당 가입한 위대한 화가 입체파 초현실주의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리다만 그림 납골당 그리고 수많은 평화의 상징 비둘기

"그림은 일기를 쓰는 또다른 방법일 뿐이다." 파블로 피카소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는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일대를 나치군이 1937년 4월 26일날 24대의 비행기로 폭격하는 장면을 실은 스페인 내전 신문내용을 보고 한 달 반 만에 유성페이트로 그린 대벽화 그림이다. 크기가 3.49m x 7.77m이다. 위치는 파리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에 있다. (1937년작)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직후에 미술의 중심지로서 자리를 잡고 싶었던 파리미술계는 최대한 신속하게 미술계의 패권을 잡고 싶어서, 1944년 가을 미술전을 열었다. 그 내용은 파블로 피카소에게 헌정하는 엄청난 회고전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마티스의 회고전까지 열었다. 이 모든 과정들이 조용히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것은 파블로 피카소가 자신이 공산..

Art 2020.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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