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로젠퀴스트는 좀 더 확연한 서술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브로드웨이의 거대한 광고 간판과 경쟁하는 듯한 작품들을 만들어 일약 거대화의 챔피언이 되었다.
그의 그림은 오직 시각적인 효과만을 노려 표현을 간소화하는 광고적 기법을 차용한 것이었다.
1965년에 제작한 그의 거대한 그림들 중 하나에는 베트남 전쟁에 사용한
유명한 미국 폭격기인 F-111기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 폭격기는 실물 크기 그대로 표현되어
거대한 살인 병기의 엄청난 시각적 효과를 보여주었다.
1961년에 아들을 위해 '미키'를 만들었던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그물눈 스크린과 만화를 철두철미하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가장 눈부신 원형들을 팝 아트에 제공했다.
이 원형들은 채색 앨범의 도식화를 통해 선별한 기초적인 인용의 형태로 20세기 미술사를 주저 없이
재해석해 냈다. 회화적 재료를 대신하는 인쇄술의 그물눈 스크린에 의해 엘리트주의 문화의
주제와 모티브, 지표가 대중문화의 그것과 맞닥뜨리게 됨으로써 기계적 복제시대의 회화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많은 미술가는 회화를 버리고 오브제와 설치 미술을 선택했다.
클래스 올덴버그는 시선을 끄는 색채와 플라스틱 음식이 놓여 있는 제과점과 정육점 진열대 작품을
다수 제작한 후 거대한 오브제에 도전하였다. 그의 아이러니는 빨래집게 형태의 개선문이나
뒤틀려서 반대쪽으로 꺾인 골이 파인 나사못 하나로 이루어진 다리를 상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엉뚱한 재료들을 역설적으로 사용하여 사물을 터무니없이 크게 확대시켰다.
그는 두세 개의 담배꽁초가 찌그러져 있는 재떨이도 만들었는데, 이것은 수영장만 한 크기였고 별로
쾌적하지 않은 부식된 강철로 색을 띠었다. 또한 그가 만든 화장실 변기는 부드러운 플라스틱의
물컹물컹한 형태 속으로 무너져 내렸으며, 침묵하는 재즈 타악기는 헝겊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1961년 에드워드 키엔홀츠는 '락시의 집'을 만들어 사창가의 모습을 작품화하였다.
그는 그의 첫 환경 미술을 '잡동사니'라고 칭했다. 이 방탕한 장소에서, 큐비즘의 콜
라주와 슈비터스의 '메르츠',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이어받은 '혼합 미디어'의 미술은
상상의 세계를 현실의 친숙한 공간 속으로 깊숙이 끌어넣었다. 그는 1968년에 만든
기념비적 작품 '포터블 전쟁 기념물'을 통해 군사 선전의 도상을 왜곡하여 그 기괴함을
드러내 보였다. 그가 제작한 미국 해군들은 칠판에 승리의 글귀들이 새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라스 한복판에 별이 박힌 깃발을 꽂고 있었다. 또한 그는 1965년 벼룩시장에서 찾아낸 여러 개의
괘종시계로 술집의 모습을 재구성하여 '식당'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에서 시계들은 그럭저럭 시간을 죽이려고
애쓰는 마네킹-소비자들의 머리를 대신하였다.
조지 시걸의 폼페 이적인 주조물이 이루어낸 상상의 고고학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가 만든 실제 크기의
고독한 익명의 석고 인물들은 진부한 일상에서 따온 몇몇 실제 사물이 있는 배경 속에 자리했다.
판에 박인 태도 속에 고정되어 버린 유령 같은 인물들은 아무런 우연한 사건도 없는 사람들의 미니멀한 조형적
형식주의를 무심하게 가로질렀다. 동성애자들의 벤치와 구역 영화관의 고독한 판매원이 앉아 있는 환히 밝혀진
감옥이 나란히 존재하는 극도로 도시화되고 몰개성적인 사회 속에서 이들은 영혼 없는 육체였다.
20세기의 또 다른 서막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팝 아트는 환상 없는 삶의 배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배경 속에서 일상적인 진부함은
디스플레이어의 쇼윈도와 광고 간판에 포착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도시적 유희를 점령한 볼거리의 사회는
끊임없이 자신의 그림자에 몰두했다. 악귀가 물러나고 공포는 잊혔지만,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다.
같은 해 존 케이지는 그의 '침묵'을 '들려'주었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밤>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20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가에탕 피콩이 '여전히 파문을 일으키는 유일한 미술가'라고
칭한 장 뒤뷔페는 60세에 처음으로 파리 장식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여는 영광을 누렸다.
요제프 보이스는 뒤셀도르프 조각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밀라노에서는 피에로 만초니가 모델의 피부에 직접 서명함으로써 '살아 있는' 조각을 만들었다.
브랑쿠시가 아틀리에를 세웠던 파리의 롱생골목에서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래리 리버스, 장 탱글리,
니키 드 생 팔이 석고로 덮인 그림에 총을 쏘았다. 특히 니키 드 생 팔은 물감 봉지에서 모든 색을 소진하는데
신경을 썼다. 이러한 행위들은 장 뒤뷔페가 남긴
"미술은 언제나 약간의 두려움과 약간의 웃음을 주어야 한다."라는 유명한 문구에 대한 예증이었으며,
급변하는 표현 방식에 부합했다. 구조주의적인 해석 방식과 '주제의 소멸'은 '사물'에 우선성을 부여해 주었다.
이 '사물'이란 아무런 정신 상태도 따지지 않는 채 예찬해야 할, 혹은 결렬한 항의를 통해
산산조각 내야 할 특수한 지식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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