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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생산과 사회의 소비방식이 만들어 낸 키네틱 아트와 옵 아트 모빌 &스태빌 최초의 미술 운동 제로 눌 그룹 밀라노 그루포T ,N

u-noh 2020. 10. 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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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더의 '모빌' 혹은 '스태빌'의 거대하고 평온한 줄기 형상들은 놀라운

운동적 소요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아슬아슬하게 공중에 떠 있는 정체가 

불분명한 많은 사물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매우 유희적인 경쟁을 통해 현대성의 재료들과 자질구레한 작업의 즐거움이 상기되었다.

이 유희적 경쟁은 날마다 세계의 경험을 잠식해 들어가는 첨단 기술뿐 아니라

속도의 절대적 영향력, 그리고 우주 정복으로 야기된 열광적 도취와도 서슴없이 대결을 벌였다.

매우 시각적인 동시에 매우 가시적인 미술적 혁명에 의해 고양된 새로운 사고가 모든 진보의 영역에서 나타났다.

여기저기에서 반 목공장이자 반 기술자인 미술가들로 구성된 그룹이 생겨났다.

이러한 집단에서 화가는 건축가와 디자이너뿐 아니라 엔지니어나 과학 연구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만약 형태적 새로움이 미술 생산과 소비 방식의 사회적 변화에 부응하지 못했다면, 그러한 새로움의 

행복한 우연성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을 것이다.

 

 

 

    1955년에는 바사렐리의 주도하에 파리의 드니즈 르네 갤러리에서

'움직임'전이 열렸다. 바사렐리는 카셀에서 열린 첫 번째 도쿠멘타에 즈음하여

같은 해 <노란 선언문>을 출판했다. 이 선언문에서 그는 

'미래는 움직이는 감동적인 새로운 조형미로서 행복을 우리에게 마련해 두었다'

라고 외쳤다. 흑백의 대조에 중점을 둔 그의 작품들은 정교한 채색과의 단절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문화적 책임에서 미술은 해방시켰다. 또한 1950년부터 파리에 거주하고 있던 베네수엘라 출신의

헤수스 라파엘 소토는 플렉시글라스를 이용하여 일정한 크기의 체커 놀이판의 면들을 포개어놓거나

검은색과 흰색의 띠가 교차하는 작품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957년부터는 검은색과 흰색의 미세한

가는 줄이 간 받침대 위에 늘어뜨린 금속줄 기법을 사용하였다. 이 줄들은 관람자의 최소한의 

움직임에 의해서도 말 그대로 불안정을 야기하는 격렬한 시각적 진동을 불러일으켰다.

'움직임'전에서 마르셀 뒤샹이나 장 탱글리의 존재가 이미 다른 가능한 길들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바사렐리를 필두로 망막 생리학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1957년 뒤셀도르프에서 '제로' 그룹이 결성되었다. 

이 그룹은 나치즘의 치명적 죄악 때문에 유폐된 독일을 침묵에서 대담하게 끌어낸 최초의 미술 운동이었다.

많은 비용을 들여 복원한 바로크 미술은 밝았던 문화적 과거를 되살렸고, 사방에서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또한 오랫동안 검열을 받으며, 퇴폐 미술가로 낙인찍혔던 20세기 거장들의 작품이 다시 전시되었다.

하인츠 마크와 오토 피네, 귄터 위커는

새로운 독일 미술가 세대를 위해 현대성의 국제적 각성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했다.

 

하인츠 마크는 전기 발전기와 빛을 발하는 저부조 작품 외에도, 현대화된 원시 의식을 위한

웅장한 무대 장식을 구상하였다. 그러한 작품으로는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에 세워진 듯한 

거울로 만들어진 기념비를 들 수 있다. 오토 피네는 빛의 안무와 불과 연기의 회화, 그리고

바둑판무늬를 만들어 냈다. 또한 권터 위커는 표면에 일정하게 못을 박아 프로젝터의 광선 발레에 투사시켰다.

전후 다시 깨어난 독일 최초의 위대한 미술가였던 이들은 세계적 야심으로 고무되었다.

루치오 폰타나와 이브 클랭이 곧 그들의 몇몇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1957년에서 1967년까지 10년 동안, 제로 그룹은 재건기 독일 미술의 모든 국가주의적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따라서 이 그룹은 표현주의의 '지역적'전통을 되살리려는 무기력한 사회의 경향에 끈질기게 대립하였다.

 

 

  네덜란드에서도 이에 비견하는 눌 그룹이 결성되었다.

이 그룹은 데스틸이 세운 전통을 되살려 운동적인 시각적 사물을 창조해 냈다.

이탈리아 세서는 수호적 인물 폰타나의 축복 속에 밀라노에서 그루포 T가 결성되었다.

이 그룹은 1959년에서 1966년까지 지각에 관한 '게슈탈트' 이론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동일한 설치 작품 속에 매우 이질적인 감적적, 촉각적, 시각적 지각의

요소를 섞어 놓음으로써 이루어졌다. 이 총체 미술의 장치들은 특히 보리 아니의 

스트로보스코프 방에서 빛을 발했다. 역시 이탈리아에서 결성된 그루포 N 또한

여러 영역에 걸친 활동을 보여주었다. 또 자그레브의 '신경향' 그룹은

'끊임없는 탐구'라는 명칭으로 대규모의 옵아트와 키네틱 아트 전시회를 여는 영광을 누렸다.

이 그룹은 순수한 시각적 미학의 기하학적 규칙들을 받아들임으로써 1931년부터

유럽 아방가르드로 입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보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가 건전한 새 출발이 되기를 염원하던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키네틱 아트의 발전을 거둔 곳은 파리였다.

빅토르 바사렐리는 오해받은, 혹은 '동구로 넘어갔다'는 이유로 등한시한

유럽 아방가르드의 공로를 보여준 인물이자. '신경향'이라 불린 흐름의 촉매제 역할을 한 인물이다.

드니즈 르네 갤러리는 그의 존재에 힘을 더해주었다.

온갖 종류의 힘찬 에너지, 특히 남아메리카에서 건너온 미술가들의 강력한 공동체가 바사렐리라는 중심을

향해 집중되었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소토에 이어, 아르헨티나의 훌리오 레 파르크가 뒤를 따랐다.

1958년 레 파르크는 뉴욕이 아닌 파리를  선택했다. 좀 더 후에 그는 뉴욕이 

"당시 우리나라 전체 생활의 모든 층위에서 맹위를 떨치던 미국 제국주의"의 지나치게

띠는 곳이었다고 이야기했다. 곧 부에노스아이레스 미술 학교의 동료인 오라시오 가르시아 로시와

프란시스코 소브리노가 그와 합세하였다. 또한 프랑수아 모렐 레와 조엘 스탱의 격려와 빅토르 바사렐리의

아들로서 잠시 그의 조수로 일했던 이바랄과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소브리노의 도움을 받아 1959년 

홀리오 레 파르크를 중심으로 하나의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 그룹이 실질적으로 결성된 것은 다음 해였으며

'시각 예술 연구회'라는 명칭의 앞 글자를 따 'GRAV'라고 표기하였다. 이 단체는 이론적 성찰뿐 아니라

공동 작업을 하는 그룹이기도 했다. 시각예술 연구회는 동시대의 재료들과 매우 다양한 기법을

폭넓게 수용하는 참신한 조형 언어를 사용했다. 미술과 사회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려는 

의기가 움직임과 입체감, 구조에 관한 연구와 결부되었다. 이처럼

시각예술 연구회는 도시를 향해 열린 실험실로서, 여러 기관의 

보수성과 미술계의 순응주의에 반발하며 자신의 색깔을 마음껏 보여주었다.

 

 

 

 

 

 

 

 

 

※도쿠멘타(Documenta)

독일의 카셀에서 4년마다 열리는 국제 전시회 

 

※눌 (Nul) 그룹

1961년에 설립된 네덜란드의 미술 단체

눌 파라고 도 한다. 표현주의의 추상예술을 추구하였다.

 

 

※ 옵 아트 (Op art)

기하학적 형태나 색채의 장력을 이용하여 시각적 착각을 다룬 추상미술

 

※ 키네틱 아트 ( kinetic art)

작품 그 자체가 ㅇㅁ직이거나 움직이는 부분을 넣은 예술 작품의 방식

최초 작품으로 뒤샹이 1913년에 자전거 바퀴를 사용하여 제작하 <모빌>이 꼽힌다.

 

 

 

 

 

 

라루스 서양미술사 중 현대미술 중

뒤샹의 최초 작품 '모빌'

독일에서 시작한 최초의 미술 운동 '제로'

네덜란드 '눌 그룹'

이탈리아 '그루포 T' - 수호적 인물 폰타나 축복 = 게슈탈트 이론 형성

이탈리아 '그루포 N' 

자그레브의 '신경향' 그룹- 끊임없는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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