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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처럼 찰나였던 추상미술 옵 아트와 키네틱 아트의 시각예술연구회의 훌리오 레 파르크 미로 복원

u-noh 2020. 10. 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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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미술인 옵아트가 자연적으로 스스로

해체될 때까지

시각예술 연구회는 여러 곳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

먼저 참여한 전시회는

폰투스 훌텐이 암스테르담의 

스테델릭 미술관에서 개최한

대규모 국제 키네틱 아트 전시회이다.

그러고 나서 스톡홀름 미술관 전시회에

참여하고 1964년 도쿠멘타 3에 참석

1963년과 1965년에는

파리 비엔날레에 전시회에도 참석하게 된다.

 

1966년 보르도의 시그마 전과 1967년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의 빛과 움직임 전시회에도 참가하게 된다.

시각예술 연구회 그룹이 사회적 이상을 표현함에 따라 빠른 속도로 미술계의 한계를 넘어섰다.

일상에서 입는 기성복과 미국의 브리지 라일리의 음반 재킷,  우리가 아는 이브 생 로랑의 드레스

그 밖의 대량 생산되는 보급된 가구가 모두 옵 아트의 표현법으로 이름표를 달고 쉴 새 없이

아틀리에에서 일반 사람들의 거리로 나갔다.

옵 아트의 성공은 기대 이상의 대 성과였다.

 

1966년 4월 19일  우리나라에서는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날에 물론 우리나라는 1960년이지만

날짜는 같은 4월 19일 혁명적인 날에 

시각예술 연구회는 파리에서 규범을 벗어난 매우 유희적인  행위로 파리를 혁명의 거리로 만들었다.

공공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무질서를 앞세우며 창조성과 열정을 통해 다시 잠잠했던 미술을 움직이게 하였다.

같은 해에  훌리오 레 파르크에게 베니스 비엔날레 대상이 안겨주어 줬다.

미술의 창조성과 그의 미술에 대한 열정 및 구성 감각을 인정한 것이다.

색채에 대한 열정적인 연구와 게을리하지 않았던 미술가를 향한  답례라고 생각된다.

반면 개인 작업이 아닌 집단 작업의 선의의 경쟁을 통해서 훌리오 레 파르크는 1959년 

최초의 전기 광선 작업의 경험을 엄청나게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 결과물인 '빛의 시대'가 홀리오 레 파르크의 이름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미술이라고 하기에는 기계공의 기계작업물인 것 같은 작업실에서 탄생한

빛의 시대 홀리오 레 파르크 

 

훌리오 레 파르크는 단순성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아주 좋은 솜씨를 발휘해 솜씨 좋게 

만들어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단순성을 통해서 불안정한 총체에 대한  본인만의 관심을

보여주는 전대미문의 시각적 요소가 만들어지는 성좌가 우뚝 성립된 것이다.

유동적이라 자유롭고 비물질적이라 표현이 자유로우며 투명해서 여러 가지 색도 

마음대로 입힐 수 있는 빛이라는 물체를 활용해 작품을 만들고 그 빛이라는 작품들을 통해

관람자는 지극히도 개인적인 자유를 빛이라는 광채의 시각적 축제 같은 전시에 어쩔 수 없이 같이 함유할 수밖에 없었다.

 

 

 

훌리오 레 파르크의 콜라주 작품들을 보면 단순한 패턴이 입체로 보이는 단순 입체모양의 반복이다.

단순한 입체모형의 형태 위에 14개의 색계의 무한한 가능성과 기초적인 그물눈 스크린 전개를 이용해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작품들을 끊임없이 작업하였다.

구조와 움직임 그리고 빛을 활용한

또는 환경에 관한 이러한 다양한 탐험 작업을 통해 시각 미술의 객관적 법칙을 잘 이용해

효율성과 눈에 매치는 이상 야릇한 형상의 매혹적인 형태나  보는 관객들의 황홀감의 기쁨을

느낄 수 있게 아주 교묘하게 철저히 계산된 결과물은 훌륭한 작품으로 인정하는 단계까지

만들어 낸 것이다.

구조와 움직임, 빛, 환경에 관한 여러 가지 시각적 시각미술의 객관적인 법칙으로 인해

아주 효율적으로 멋진 작품을 완성한 것인 것이다.

철저한 방법으로 엄격하면서도 정확한 표현은 감미롭고  다양한  다채로운 색의 풍요로움으로

놀라울 만큼 큰 파동을 만들어 내고 그 파동은  떨림으로 보는 사람 즉 관람객은 3차원적 환각에 

빠저 들게 된다.  인상적인 3차원적인 환각상태를 만들어 내는 훌리오 레 파르크의 콜라주 작업은

아주 매혹적이고 훌리오 레 파르크는 그물눈 스크린 전개 방식 작업물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었다.

 

가장 쉽게 흐려지는 형태와 가장 눈부신 형태와는 극과 극이 통하는 것과 같이 닮아 있었으며

가장 계획적인 구성은 가장 많이 활용되는 패턴이 되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미술 비평가 중에 한 명인 

쥘리앙 알바르는 이렇게 이렇게 표현했었다.

매끄러운 얇은 강철판을 뒤틀어놓은

1966년 연속적 빛 작품에서 값비싼 암고양이들을 위한 유연성 강의를 발견했을 정도였다. 

훌리오 레 파르크는 지금의 현 시간 어둠 속에서  행복이라는 것을 미(美)로써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 것 같다.

 

 

 

 

미술과 과학, 기술과 사회의 구조가 조화를 이루도록 시도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이상 현실 유토피아를

되살리려 했던 키네틱 아트와 옵 아트 그룹의 대 성공은 눈부시었다. 

그 눈부신만큼 찰나였다.

미술은 곧 캔버스라는 이미지가 아닌 과학적인 작업은 미술작품의 의미의 문제를 만들어내고

미술이라는 관계가 대중뿐만이 아닌 공간과 재료 그리고 과학적 기술과의 결합이라는 문제로 다시금

쇄신하게 된 것이다.

옵아트와 키네틱 아트의 작업 수용이나 사회적 파급 효과에 시각예술 연구회는 더 열을 쏟아 연구했고

가전제품보다는 더 친근한 기초적인 형태의 단순한 기계 설치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또 기존의 재료가 아닌 플라스틱 재료로 된 설치 작업에도 열을 올리게 된다. 이러한

플라스틱 제품의 탄생과 관람객들의 참여가 늘어나자 시각예술 연구회는 기존 미술 시장의 관습을 과감히 버리고

복수 제작품을 만들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공익을 위한 작품을 설치하고 설치 작품의 공익을 택했다.

공익을 택한 대가로 시각예술연구회는 에펠탑과 쌍벽을 이루며 라데팡스에 설치하려 했던 

니콜라스 슈츠회 페르의 키네틱-광선 탑은 설계에 그치고,  옵아트와 키네틱 아트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가장 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하지만 미술 관과 공공 컬렉션은 시각예술 연구회의 대중적인 성공에 어쩔수 없이 응할 수밖에 없었고

파리의 에스파스 엘렉트라는 1966년에야 훌리오 레 파르크의 '빛의 시기'를 다시 전시했으며

마가쟁 드 그르노블은 1998년이 되어서야 시각예술 연구회의 '미로'복원 전시를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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