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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에서 토인비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베드페이팅과 서술적 회화의 에릭퓌슬 낙서미술의 키스해링 정치미술의 한스하케 게르마니아

u-noh 2020. 8. 13.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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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만들어져 밀려들어오는 수많은 작품들은

보란 듯이 전시회를 열고 그 모습은 마치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장관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림 경매의 기록도 계속 이어져 나아갔다.

이렇게 많은 그림들이 서로 앞 다투어 전시라는 명분을

만들다 보니 지금까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장소에서도

전시를 행하게 하고 그 동안 선입견을 갖고 있던 모든

생각들이 와해해 버렸다.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공간에 그림 작품들이 들어가고

벽이 있던 벽이 없던 상관없이 노상의 주차장 같은 곳에도

그림이라는 아트라는 명분을 달고 들어가 전시를 했다.

 

이러다 보니 미술관은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건물의 중심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점점 더 진화하는 2000년의 미술세계는 맞춤형이 되어가고 있다.

 

소비자 패턴에 맞춤형이 되어가고 있는 현대미술은

맞춤형 미술인 것이다.

 

미술 작품 그 자체를 위해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시대는

 

지금은 아니다.

 

물론 존재하고 있기는 하나 아주 소수의

저 밑에 존재하고 있는 아주 작은 공간만 차지하고 있을 뿐

지금 현재 현대미술은 화려한 불빛처럼

요란하고 이상스럽고, 괴기스러운 아니면 디즈니랜드처럼

꿈과 희망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소비자들은 원하고 있다.

 

그 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아니 보여줄 수 없었던 새로운 작품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하늘의 신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볼 수도 없었던 신화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우리들 일상 속에서 느끼고 볼 수 있었던 것들이 아닌

앞으로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작품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대중들을 원하고 있다 대중들이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

눈이 아닌 마음의 예술작품을 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술작품 이라고 하면 그 동안 일반화를 하기 힘들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어렵게만 느끼고 전문가들만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불어 예술을 전시하고 운영하고 하는 모든 일들은 꼭

전문가들만 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왔다.

이를 비웃기라도 한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이 생겨났고 베드 페이팅이 나타났다.

 

유노 시리즈 중에 한 작품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아널드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이다.

대중성의 미술로 작가의 자율성과 개성을 나타내며

다양성에 중심을 두고 있는 작품들을 뜻한다.

 

 

20세기 중후반에 일어난 문예운동으로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시 하는 미술 포스트모더니즘은

19세기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예술경향인 모더니즘이 점점 더 시간이 갈수록 기하학적인 형태를 보이고

점점 더 추상화가 되어 갔고

그 반대로 구상적인 그림은 수준 낮은 미술로 취급하는 시대였다.

대중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하고 어려운 그림을 고급미술이라고 생각하며 참아내야만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수준높은 작품과 수준낮은 작품이라고 나누어지는 현상에 반발하고 나타난 미술계 경향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중들과 소통하는 것이면 무엇이든간에 예술로 인정해 주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작가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었다.

작가의 개성있는 작품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표현 방법들이 개성강한

작품을 만들 수 있게 했다.

또한 차용을 인정함으로써 남의 작품을 빌려와 작품을 했으며

그 기법을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러다 보니 작품들의 종류는 엄청나게 다양해지고

대중들은 다양하고 접근성이 쉬운 구상적인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아주 사소한 개인적인 내용이라도 작품으로 승화했고

어려웠던 정치적인 문제 폭력이나 인권 인종차별 같은 조심스러운 사건부터 사회적인 사건까지

다양한 주제들이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또한 그림의 수준을 높다고 혹은 낮다고 평가하지 않은 것처럼

기존에 수준이 낮은 것으로 평가 받았던 만화나 잡지, 광고 등을 작품에 이용했다.

더불어 그 동안 소수 집단의

흑인미술 이거나 여성작가들의 미술작품도 다시 부각되었다.

대중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구상적인 작품들도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전시 형태도 아주 다양하게 진행했다.

그림이나 조각뿐만이 아니라 설치도 같이 혼합되어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다양한 양식의 형태로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전시했다.

그 동안 전시란 진열된 작품들을 관람객들이 보여지는 것만 보았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시란

관람객이 직접 전시에 참여하여 개최되는 형식을 사용하였다.

관람객이 직접 작품제작에 참여하는 전시도 있었다.

지금까지 행해진 작품 형식이나 작품의 내용이 정해진 것이 없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미술차용을 허용함으로써

개인의 창조력보다는 과거의 유산에 의존하는 것도 인정했다.

그래서 고대 신화 속의 이미지나 미술사에 나오는 이미지를 사용해 작품을 만들었다.

신디 셔먼(C.Sherman)

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같이 스타일을 하고

여러 직업과 상황에 맞는 동작을 바꿔가며 변장한 사진을 작품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찍은 사진을 통해 약한 여성이 사회에서 강요받는 것들에 대해 비판했다.

 

바브라 크루커(B.Kruger)는 광고 속의 그래픽 스타일을 흉내내서 작품을 만들었다.

에릭 퓌슬(E.Fisch)[섬의 여행객과 주민]이라는 작품은

잘 살고 돈 많은 부유한 여행객과 가진 것 없고 가난한 흑인 노동자를 위협하는

폭력적인 세계 사이의 무관심과 단절된 상황을 대비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미국 중산층의 현실 삶에 드리운 삶의 고독감과 절망감, 공포의 모습들을 그려내고 있다.

에릭 퓌슬의 이야기 하는 듯한 서술적 회화는

감상하는 관람객에게 심리적인 긴장감과 감성적인 복잡한 마음을 들게 만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낙서 미술도 만들어 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낙서는 아주 오랫동안 생활의 흔적이다.

낙서는 인류가 문화를 갖기 시작하면서부터 해 왔던 생활의 흔적인데

1960년대 말에 뉴욕의 구석진 거리에서 낙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흑인이나 소수민족들이 스프레이나 값싼 페이트를 이용해

채색하고 강력하고 격렬한 에너지로 속도감 있게 표현한

그림과 문자들이다. 이것을 키스 해링(Keith Haring)같은 미술가들이 더 발전시켰다.

 

작품속에 정치나 사회의 현상을 담은 정치 미술이

1980~1990년대 미술사에 나타났다.

정치.사회와 관련된 문제를 언어를 통해 표현한 작품이 많이 만들어졌다.

독일출신의 한스 하케는

마치 본인이 신문기자인 것처럼 정부나 기업의 문제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오브제나 사진, 문장을 이용해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대중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대표작으로 [게르마니아]는 히틀러가 독일을 얼마나 짓밟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제니 홀저는

포스터와 거리의 전광판을 이용하여 뜻밖의 새로운 문장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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